[동부뉴스=조성진 기자] 이재명 정부의 '통합 인사'로 주목받았던 인요한 전 국민의힘 의원의 대한적십자사 총재 취임에 막판 제동이 걸렸다. 적십자사 중앙위원회 선출에 이어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의 취업심사까지 통과해 이재명 대통령의 최종 인준만 남겨둔 상황에서,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통령에게 직접 반대 의견을 전달하면서다.
김 대표는 지난 25일 청와대에서 열린 이 대통령과 민주당 신임 지도부의 만찬 직후 대통령과 별도로 만나 인 전 의원의 적십자사 총재 인준을 재고해달라는 뜻을 전달했다. 박성준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김 대표가 당 안팎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한 결과를 대통령에게 전달했다"고 확인했다. 이 대통령이 어떤 답변을 내놓았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청와대 역시 "검토할 예정"이라는 입장만 밝혔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인 전 의원이 총재 취임을 위한 사실상 마지막 행정 관문을 넘어선 직후였다.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가 인 전 의원의 대한적십자사 취업을 '가능'으로 결정하면서 남은 절차는 대통령 인준뿐이었다. 순탄히 마무리되는 듯했던 인선이 하루 만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 셈이다.
'통합 인사'에 따라붙은 계엄 논란, 그리고 순천의 인연
인 전 의원은 지난 6월 22일 대한적십자사 중앙위원회에서 제32대 총재 후보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의원을 지낸 인사를 정부 산하 주요 기관장에 기용한다는 점에서, 이재명 정부가 강조해온 통합·포용 인사의 상징적 사례로 받아들여졌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유진 벨의 4대손인 인 전 의원은 태어난 직후인 1959년 가족과 함께 전라남도 순천으로 이주해 유년기를 보냈다. 부친 휴 린턴(한국명 인휴)과 모친 로이스 린턴(인애자)은 1962년 순천 대홍수로 결핵이 확산하자 순천기독진료소와 결핵요양원을 세워 수백 명의 환자를 무상으로 돌봤다. 부친은 1984년 교회 건축 자재를 운송하다 교통사고로 숨졌고, 인 전 의원은 이 일을 계기로 1992년 국내 최초의 특수구급차를 개발해 순천 진료소에 처음 도입했다. 부부의 묘소도 지금의 순천 결핵재활원 부지에 있다. 적십자사 안팎에서 그의 총재 기용을 "의료 구호에 뿌리 깊은 인연을 가진 인사"로 반겼던 배경이다.
그러나 인선 직후부터 12·3 비상계엄 당시 그의 행보를 둘러싼 논란이 불거졌다. 인 전 의원은 계엄해제요구안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고,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에도 불참했다. 계엄 선포를 두고는 "가슴으로는 이해한다"는 취지로 발언하기도 했다.
인 전 의원은 이후 의원직에서 물러났고, 적십자사 총재로 선출된 뒤에는 "계엄은 불법이고 잘못된 것"이라며 당시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반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정치권과 노동계 일부에서는 국가적 재난과 구호를 책임지는 적십자사 총재의 상징성을 고려하면 당시 행적을 가볍게 볼 수 없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인 전 의원이 과거 국민건강보험 체계를 "사회주의적 경향이 강하다"고 평가하고, 영리법인 병원 도입과 민간의료보험 규제 완화의 필요성을 주장했던 전력도 도마에 올랐다. 대한적십자사는 혈액사업과 재난구호뿐 아니라 전국 적십자병원을 운영하는 공공의료기관이다. 보건의료노조가 계엄 당시의 정치적 행보보다 오히려 그의 의료정책 인식을 총재 부적격 사유로 앞세운 것도 이 때문이다.
강현근 보건의료노조 대한적십자사본부지부 의장은 "의료 기득권을 대변하며 영리병원 도입을 적극 주장했고, 민간의료보험 규제 완화도 거듭 주장해온 인물"이라며 "탄핵 반대라는 정치적 사유만이 문제가 아니다"고 말했다. 인 전 의원의 반성 입장에 대해서도 노조는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가 과거에도 적십자사 총재 후보로 여러 차례 거론되는 등 총재직에 관심을 보여왔다는 점을 들어, 뒤늦은 반성이 총재 취임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주장까지 내놨다.
후보도 몰랐다?…선출 과정까지 논란 확산
인 전 의원 개인의 적격성에서 시작된 논란은 총재 선출 과정 자체로 번졌다. 대한적십자사 중앙위원회는 지난 6월 인 전 의원을 총재 후보로 선출했지만, 어떤 후보들이 검토됐고 전형위원회가 어떤 기준과 절차로 그를 추천했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강현근 지부장은 중앙위원회가 열리는 날까지 적십자사 직원은 물론 중앙위원들조차 후보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고, 회의장에서 후보자를 통보받은 뒤 별다른 검증 과정 없이 약 30분 만에 의결이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과거에도 대통령실이 사실상 낙점한 인물이 중앙위원회 후보로 올라오는 방식이 반복돼 왔다며, 이번 인선 역시 사전 조율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적십자사 총재직이 7개월 넘게 공석이었던 만큼 조속한 선임이 필요했다는 현실도 있었다. 노조 역시 올해 초부터 국회와 보건복지부 등에 총재 선임을 요구해왔다. 다만 공석을 서둘러 해소하는 것과 후보 검증 절차의 투명성은 별개의 문제라는 게 노조 측 주장이다.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의 취업심사를 하루 앞둔 지난 24일, 조국혁신당 백선희 의원과 진보당 전종덕 의원, 보건의료노조 등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인 전 의원의 자진 사퇴와 취업 제한, 대통령의 인준 거부를 요구했다. 백 의원은 영리병원과 민간의료보험 관련 인 전 의원의 과거 발언을 문제 삼았고, 전 의원은 "적십자 회장 자리는 정치적 알선이나 보은 인사로 채우는 자리가 아니다"고 말했다.
노조는 인 전 의원 선출 이후 3주 만에 반대 서명에 2만 명 이상이 참여했고, 정기후원자 300명 이상이 탈퇴했다고 밝혔다. 헌혈을 거부하겠다는 민원까지 들어오고 있다는 주장도 내놨다. 코로나19 이후 경영난이 이어지는 적십자병원 사정을 감안하면, 총재를 둘러싼 논란이 헌혈과 후원 등 국민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적십자 사업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 노조 측 우려다.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가 인 전 의원의 취업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이유는 정치권과 노동계가 제기한 논란과는 판단 영역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공직자윤리위의 취업심사는 총재로서의 정치적·도덕적 적격성을 판단하는 절차가 아니라, 퇴직 전 업무와 취업 예정 기관 사이의 직무 관련성을 심사하는 제도이다.
김민석은 왜 인준 직전에 제동을 걸었나
정치권의 관심은 인 전 의원의 적격성 논란을 넘어, 김 대표가 왜 이 시점에 직접 반대 의견을 냈는지로 옮겨가고 있다.
김 대표의 건의가 나온 날은 인 전 의원이 국회 취업심사를 통과한 당일이자, 국회에서 초당적 반대 기자회견이 열린 바로 다음 날이었다. 더욱이 이 대통령이 민주당 지도부와 만난 자리에서 진보·개혁 진영을 비롯한 기존 지지 기반과의 연대를 강조한 시점과 맞물리면서 정치적 배경에도 관심이 모아졌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중도·보수층으로 외연을 넓히는 과정에서 누적된 핵심 지지층의 불만을 김 대표가 대통령에게 전달한 것으로 본다. 그동안 여권은 중도·보수 인사까지 끌어안는 이른바 '빅텐트' 전략을 강조해왔고, 인 전 의원의 적십자사 총재 기용 역시 그 연장선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당 안팎에서는 외연 확장이 필요하더라도 12·3 비상계엄과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문제까지 포용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반론이 이어졌다. 중도·보수 인사를 끌어안는 것과 계엄 당시 행적에 논란이 있는 인사를 기용하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시민 작가도 인 전 의원의 적십자사 총재 선출을 "상당히 부적절하다"고 평가한 바 있다.
외연 확장은 계속, 계엄에는 선 긋기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25일 민주당 신임 지도부와의 청와대 만찬에서 "다른 점을 찾아내기 시작하면 원수의 길로 갈 것이고, 같은 점을 찾아내면 우애 있는 형제가 된다"며 포용을 강조했다. 동시에 "당정청은 공동운명체이고 한 몸이다. 민주당 없이 정권이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의 발언과 김 대표의 인준 반대를 같은 흐름으로 해석한다. 중도·보수층을 향한 외연 확장과 통합 기조는 이어가되, 12·3 비상계엄과 탄핵 문제에서는 분명한 선을 긋겠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통합을 명분으로 계엄을 옹호하거나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은 세력까지 포용해서는 안 된다는 진보·개혁 진영의 요구를 반영해 '통합의 경계'를 설정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김종배의 시선집중' 진행자 김종배씨도 김 대표의 건의 사실이 공식 브리핑을 통해 공개된 것은 대통령과 여당 대표 사이에 실제 교감이 있었을 거라고 주장한다. 인사 갈등이 있었다면 청와대 만찬 직후 이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대통령과 김 대표 사이에 어느 정도 교감이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김 대표의 인준 반대가 대통령의 통합 기조에 대한 제동이라기보다, 진보·개혁 진영의 반발을 수용하면서 인요한 카드를 접을 수 있는 정치적 명분을 마련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신임 지도부와의 청와대 만찬에서 “우리가 (그동안) 왼쪽을 너무 안 챙겼다”며 진보 진영을 더 함께 품고 가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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