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달이 지난 지금 정전은 이뤄졌지만, 미국 컨설팅기관 아시아그룹(The Asia Group·TAG)이 지난달 25일 낸 보고서 ‘노 세이프 하버(No Safe Harbor)’는 한국이 초기 충격을 비교적 잘 막아냈지만, 호르무즈 위기에서 승자는 중국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은 원유 수입량의 70%를 걸프 지역에 의존한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한국은 세계 제트유 시장의 30%, 미국이 수입하는 제트유의 70%를 책임지는 압도적 1위 수출국이다. 항공유 가격은 항공화물 운임에 그대로 반영되는 구조여서, 한국 정유공장의 생산이 흔들리면 그 여파는 여행객의 항공료를 넘어 전 세계 수출입 물류 비용 전반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게 보고서의 지적이다.
더 예민한 지점은 반도체다. 헬륨은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초저온 냉각과 불순물 제거에 쓰이는 필수 가스로, 다른 물질로 쉽게 대체할 수 없다. 카타르의 라스라판 가스전이 이란의 공격으로 타격을 입으며 세계 헬륨 공급의 3분의 1가량이 한꺼번에 흔들렸고, 헬륨 현물 가격은 3월 이후 40~100% 뛰었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세계 최대 헬륨 소비국답게 웃돈을 주고서라도 물량을 확보해왔다. 다만 보고서는 이런 프리미엄 지불 방식이 공급 부족 자체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고 짚었다. 여기에 세계 4~5위권인 한국의 석유화학·정유 산업까지 걸프산 원유·나프타에 기대는 구조여서, 이번 위기는 한국 경제의 핵심 산업을 동시에 건드린 셈이 됐다.
AI 시뮬레이션은 가을 이후를 더 어둡게 봐
정부는 빠르게 움직였다. 비축유를 풀고 유류세를 낮추는 한편, 정유사에는 손실을 보전해주고 전쟁 위험으로 치솟은 보험료 부담을 국가가 대신 떠안는 방식으로 초기 충격을 막았다. 그 결과 올해 성장률은 지난해의 거의 두 배인 1.9%로 전망되지만, 위기가 길어지면 이 수치가 최대 1%포인트까지 깎일 수 있다고 보고서는 경고한다. 성장률이 1%포인트 낮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새로운 일자리와 기업 투자가 줄고, 가계 소득 증가세도 함께 둔화한다는 의미다.
수입 비용 증가로 원화 가치가 흔들리면 물가는 오르고, 물가가 오르면 한국은행은 경기를 살리기 위해 금리를 내리고 싶어도 쉽게 내리지 못하는 딜레마에 놓인다. 지난 6월 3일 지방선거 결과가 여당의 패배로 해석되면서, 비용 부담을 누가 얼마나 나눠 질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이재명 정부에 더 무거운 정치적 부담으로 돌아오고 있다.
TAG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 상황만 따로 떼어내 인공지능(AI)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청와대, 한국은행, 국회, 4대 그룹을 각각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AI 행위자로 설정해, 6월 11일을 기준으로 180일간의 전개를 50차례 반복 계산했다. 결과는 정부가 8월까지는 정책 수단을 동원해 정유업계 가동률과 가계 부담을 무난히 방어했지만, 9월 이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전체 시뮬레이션의 80%에서 12월까지 한국의 제트유 수출이 위기 이전의 절반 수준으로 급감했는데, 이것이 미국 서부·하와이는 물론 호주·싱가포르·베트남 등 한국산 항공유에 의존하는 나라들의 항공 운항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기요금 동결을 유지해온 한국전력의 누적 손실은 모든 시뮬레이션에서 예외 없이 불어났고, 180일 안에 뚜렷한 해법이 등장하는 경우는 없었다. 전체의 14%에 해당하는 시나리오에서는 헬륨 확보 경쟁이 값의 문제를 넘어 물량 배분의 문제로 바뀌면서, 반도체 기업들이 범용 메모리 생산을 줄이고 고부가가치 인공지능(AI)용 반도체 생산에 헬륨을 우선 배정해야 하는 상황까지 나타났다.
중국, 호르무즈 위기의 예외이자 승자
같은 기간 중국의 대응은 전혀 다른 궤적을 그렸다. 이란산 원유 수입은 공식적으로 ‘0’이지만 우회 수입 물량까지 더하면 전체 원유 수입의 12~13%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도 중국은 이를 완전히 대체하기보다 ‘덜 쓰는’ 쪽을 택해, 원유 수입량 자체를 지난해 5월 하루 1150만 배럴에서 올해 780만 배럴로 줄였다.
약 14억 배럴에 달하는 전략비축유와 1.4테라와트(TW)의 재생에너지 발전 용량이 방어막이 됐고, 유가 급등은 오히려 중국산 전기차·태양광 수출 호황(전기차·하이브리드 수출 140% 증가)으로 이어졌다. 중국은 지난 4월에는 구리·니켈 정제에 필수적인 황산 수출을 8월까지 전면 금지하며 원자재 공급망 주도권까지 쥐었다.
한국이 감당한 부담이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아시아 국가들 중에는 더 큰 대가를 치른 곳도 있었다. 원유의 95%를 걸프산에 의존하는 일본은 나프타 부족으로 도요타가 11월까지 생산 차질 8만 대를 예고했고, 일본은행은 성장률 전망을 0.5%로 반토막 냈다. 비축유와 재정 여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베트남에서는 지난 3월 주유소마다 사재기 행렬이 늘어섰고, 필리핀은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까지 선포했다. 보고서는 이런 상황을 종합해 “중국은 이번 위기에서 뚜렷한 예외였다”고 결론짓는다.
정전은 이뤄졌지만, 보고서는 예전으로 돌아갈 길은 없다고 못 박는다. 한국이 이번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고 안도하기엔 이르다. 정전이 흔들리거나 통행 제한이 길어진다면, 다음 청구서는 지금보다 훨씬 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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