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두 회장이 밝힌 투자 규모는 삼성 2655조 원, SK 2100조 원이다. 합산 4755조 원은 대한민국 명목 GDP(약 2400조 원)의 두 배에 달한다.
두 회장의 발표는 AI 수요 폭증 → 반도체 공급 부족 → 대규모 선제 투자라는 공통된 인식에서 출발했다. 이재용 회장은 "AI로 인해 기술 패러다임이 상상하지 못할 속도로 변화하고 있으며, 반도체 기업들의 적극적인 투자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수요에 대응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 시장의 시각"이라고 진단했다. 최태원 회장도 "메모리 시장은 극심한 공급 부족 상태이며 앞으로도 부족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이라며 공급 병목을 핵심 논거로 제시했다.
투자의 방향은 '비수도권 분산'에 맞춰졌다. 삼성은 광주(반도체 팹), 천안·온양(HBM), 구미(로봇), 울산(배터리), 부산(기판), 거제(조선), 송도(바이오) 등 전국을 연결하는 투자 구상을 내놨다. SK하이닉스는 용인 600조 원, 청주 100조 원에 더해 서남권 400조 원을 추가 투자해 반도체 클러스터 3극 체제를 공식화했다. 수십 년간 이어져 온 수도권·경기 남부 중심의 반도체 산업 지형을 분산시키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투자 완료 시점을 '10년'으로 제시한 점도 공통적이었다. 반도체 산업의 경기 변동성을 흡수할 여지를 남기는 동시에, 투자 이행 여부에 대한 검증 시점을 미래로 미루는 포석이기도 하다.
후보지, 전략적 환경의 차이
발표에서는 공통점과 함께 논리 구조, 후보지, 그리고 두 회사가 처한 전략적 환경의 차이도 드러났다.
최태원 회장의 발표는 '왜'에서 출발했다. "어린아이가 성장할수록 기억이 많아지는 것처럼 AI도 성능이 높아질수록 메모리 반도체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직관적인 비유로 메모리 수요 급증을 설명한 뒤, 공급 병목이 AI 생태계 자체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구조적 위기론을 먼저 제시했다. 반면 이재용 회장은 "기흥, 화성, 평택에 이어 용인 국가산단의 투자 일정이 많이 빨라졌고 새로운 단지를 준비해야 할 시점도 앞당겨졌다"며 "대통령 말씀대로 속도전"이라고 강조했다. 비전보다 실행, 설명보다 결단에 무게를 둔 발언이었다.
후보지 발표도 달랐다. 최태원 회장은 광주·전남·전북을 아우르는 '서남권'이라는 광역 표현을 사용한 반면, 이재용 회장은 '광주'를 직접 언급했다. 이 회장은 "전력, 용수, 인력 확보와 각종 인프라 등 다양한 인센티브 지원이 기대되는 광주를 후보지로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협상이 더 진전됐거나, 정치적 부담을 먼저 감수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HBM 분야를 둘러싼 삼성의 견제 의도도 읽힌다. 이재용 회장은 "HBM은 반도체 칩을 적층하는 최첨단 기술이 필요하고 메인 팹 수준의 공정을 요구한다"며 천안·온양 HBM 팹 집중 투자 계획을 밝혔다. 이는 AI 가속기의 핵심인 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에 뒤처진 삼성이 경쟁력 회복에 나서겠다는 선언으로 해석된다. 반면 SK는 이미 HBM 시장을 선점한 위치에서 공급 확대에 방점을 찍었다.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현재 국내 반도체 공급망은 수도권과 충청권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반도체 핵심 소재인 포토레지스트(감광액)와 특수 가스 등은 장거리 운송과 장시간 보관에 제약이 있는 만큼 안정적인 공급망 구축이 필수적이다. 반도체 장비 역시 문제가 발생하면 현장 엔지니어의 즉각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호남에 팹만 들어서고 소부장 기업이 함께 이전하지 않는다면 생산 효율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반도체 공장이 들어선다고 지역 경쟁력이 저절로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클러스터 조성 속도에 비해 주변 산업 생태계를 육성하는 정책이 뒤처질 경우 해당 클러스터는 외형만 화려한 '팹 섬'에 머물 가능성이 있다.
반도체 제조시설 구축에는 부지 확보는 물론 전력·용수 등 기반시설과 인재의 정주 여건, 소부장 생태계가 함께 갖춰져야 한다. 광주·전남 반도체 클러스터 역시 이에 대한 준비가 선행돼야 한다. 정부는 서남권 반도체 공장에 전력 6.3GW와 용수 65만 톤 공급을 약속했지만, 이는 국가 에너지 인프라 전반의 재편을 전제로 하는 규모다.
인력 문제도 큰 과제다. 반도체 설계와 공정 엔지니어 인력은 현재 평택·이천·화성 등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광주·전남에 반도체 공장이 들어서더라도 고급 엔지니어들이 지역으로 이동할 유인이 충분하지 않다면 공장 가동률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교육·문화·주거를 아우르는 종합적인 정주 여건 마련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반도체 경기 사이클의 불확실성 역시 투자의 변수다. 10년에 걸친 투자 계획은 AI 수요가 지속적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나 반도체 산업은 통상 3~5년 주기로 극심한 호황과 불황을 반복해 왔다. 2022~2023년 시장 급랭이 대표적인 사례다. 10년간의 투자 의지가 시장 현실과 충돌할 경우 기업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TSMC 대만 사례
이번 발표를 평가하는 데 가장 적절한 비교 사례는 대만이다. 대만 반도체 산업의 출발점은 1980년 신주 외곽의 논밭이었다. 정부는 이곳에 국립칭화대와 국립교통대를 중심으로 과학단지를 조성했다. 대학은 인재를 공급하고, 연구소는 기술을 개발하며, 기업은 생산을 담당하는 삼각 구조를 처음부터 설계한 것이다. 1987년 TSMC가 설립될 당시 국책연구기관 ITRI는 웨이퍼 팹과 장비, 기술은 물론 연구원 98명까지 함께 이전했다. 공장만 세운 것이 아니라 사람과 지식까지 함께 옮긴 셈이다.
수십 년이 지나 신주가 포화 상태에 이르자 TSMC는 남쪽 타이난으로 생산기지를 확장했다. 신주와 타이난은 도로 기준 270~290km, 차량으로 약 3시간 거리지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설비에 문제가 발생하면 즉시 대응해야 하는 협력업체들이 처음부터 TSMC 인근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독일 머크(Merck), 미국 램리서치(Lam Research),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Applied Materials)가 남부 대만에 R&D센터를 설립한 것도 정부 유치 정책보다 TSMC 인근에 있어야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용수와 전력 문제는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2021년 56년 만의 최악의 가뭄이 발생했을 때 TSMC는 물탱크 차량을 동원해 공장을 가동했다. 이후 재생수 처리시설을 대폭 확충해 하루 21만 톤 이상의 재활용 용수를 확보하는 체계를 구축했다. 전력도 마찬가지였다. TSMC의 전력 소비는 2017~2022년 사이 85% 증가했고, 대만 전체 전력의 12.5%를 TSMC 한 기업이 사용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다. 정부는 변전소 증설과 재생에너지 확대에 나섰지만 지금도 완전히 해결된 문제는 아니다.
인재 확보는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 과제였다. 가오슝에 팹이 들어서자 국립양명교통대와 국립칭화대가 가오슝 분교를 설치해 반도체 연구와 IC 설계 과정을 개설했지만, 북부 출신 졸업생들이 남부 근무를 기피하는 현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 타이난의 고급 엔지니어 채용난은 구조적인 과제로 남아있다.
기업의 결단인가
대만이 수십 년에 걸쳐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보완한 끝에 지금의 반도체 클러스터를 구축한 것은 시사점을 준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호남에 투자하는 것이 이미 생태계가 갖춰진 수도권에 투자하는 것보다 더 큰 이익이 있겠느냐"며 "사실상 정부가 호남 투자를 유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호남이라는 지역명이 구체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이 한 달도 채 되지 않았고, 충분한 공론화 과정도 없었다는 점도 지적했다.
이런 점에서 이번 메가프로젝트는 TSMC의 애리조나 투자와 구조적으로 닮아 있다. TSMC의 애리조나 공장 투자 역시 상업적 수익성보다 미국 정부의 지정학적 요구가 더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TSMC는 결국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정치적 요인과 상업적 요인은 단기적으로는 충돌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수렴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국가가 충분한 지원을 제공한다면 초기에는 '설득에 의한 투자'였더라도 시간이 지나 '수익에 의한 투자'로 성격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기업들에 손실과 위험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손해 보지 않고 더 나은 전망을 갖고 투자할 수 있도록 정부 역량을 대대적으로 투여하겠다"고 밝힌 것은 이러한 성격 전환을 국가가 뒷받침하겠다는 선언으로 해석된다. 광주전남통합특별시에 20조 원 규모의 통합 지원과 청와대 직할 담당관 신설 등 후속 조치는 그 약속을 실행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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